〈뱃腹속話말術〉 아카이브 | 배우 대담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 배경을 가진 아홉 명의 퍼포머가 어떻게 ‘집단적인 몸’이 되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그 뜨거웠던 10개월간의 기록을 나눕니다.
참여한 사람들
오윤주
프로젝트 구무를 기획하고 차학경의 《딕테》 낭독 퍼포먼스 〈Remnants. 사라진〉(2025)과 〈뱃腹속話말術〉(2026)에 연출,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박사과정 중이며, 현재 차학경의 작업에 드러난 구술성과 문자성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이혜목
〈뱃腹속話말術〉(2026)에 조연출,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화전공에서 차학경의 다매체 작업에 드러난 다성적 주체에 대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백은솔
〈Remnants. 사라진〉(2025)과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최돈미에 대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플로렌시아(Florencia)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칠레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하다 문학에 관심이 생겨 서울대학교 비교문학 협동과정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다케카니 카즈네(和音)
〈Remnants. 사라진〉(2025)과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서 학사과정 중이며, 소리, 외국어, 제2언어 습득에 관심을 두고 있다.
후걸균(侯杰鈞)
〈Remnants. 사라진〉(2025)과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어릴 때부터 시골말과 광둥어와 만다린어를 같이 사용해 왔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석사과정을 하며 언어, 문학, 예술의 교차점을 탐구 중이다.
어트건(Отгон)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민속학을 전공했다. 몽골어 및 이중 언어 강사, 번역가로 근무했다.
정현경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및 배우로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과정 중이며, 디아스포라 서사 속 음식을 주제로 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손효진
〈뱃腹속話말術〉(2026)에 각본, 드라마투르그, 사운드 및 배우로 참여했다. 현재 다양한 음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 어트건, 정현경, 손효진 배우는 개인 일정상 대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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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주 : 우선 각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섭외 요청을 드렸을 때 어떻게 참여를 결정하게 되셨는지, 원래 차학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이 작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카즈네 : 저는 차학경에 대해 아예 모르는 상태였는데, 비교문학 박사과정 중인 선생님 소개를 통해서 이런 낭독 퍼포먼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게 되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하기도 했고, 당시에 저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시기였어서, 낭독을 한다는 것이 아예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참여하게 된 건데, 들어와 보니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완전 저로서 무대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약간 충격을 받았지만… 이 부분은 이따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백은솔 : 저도 처음에는 그냥 낭독회를 한다고 해서 오게 되었는데요. (웃음) 하면서 욕심들이 다들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공연을 준비하면서 바뀐 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차학경에 대해 원래 몰랐는데, 윤주 샘과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차학경 연구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어요.
플로렌시아 : 사실 윤주 샘께 처음 연락받았을 때 신기한 느낌을 받았어요. 너무 오랫동안 이런 경험을 못 해 봤거든요. 그래서 이거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한국에 산 지 3년 되었는데, 그동안 무언가가 없고,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샘이 연락했을 때 이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의식중에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기회가 생겼을 때 너무 좋았고, 차학경 작가에 대해 대충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공연을 하면서 더 깊게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후걸균 : 1년 전 이때쯤 은솔 샘과 윤주 샘께 똑같은 질문을 받았는데요. 그때는 언어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 어떤 것을 내 몸으로 전해 받고, 그것을 내 입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해 나갈 수 있는지를, 그냥 보고 만지고 타인을 통해서 경험하는 게 아니라 내 몸에서 자발적으로 그것을 표현해 보고 싶다. 이런 식으로 대답을 드렸었거든요. 그때와 약간 달라진 지점은, 제가 원래 시를 쓰는 것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차학경을 통해서 소리 있음보다도 소리 없음의 공간에서 뭔가를 더 발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게 이번에는 더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참여하는 동안에는 플로렌시아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몰랐던 것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오윤주 : 저희가 2025년 여름 〈Remnants. 사라진〉이라는 제목으로 첫 공연을 올렸고, 2026년 겨울에 파워플랜트에서 새롭게 각본을 써서 〈뱃腹속話말術〉 공연을 또 올리게 되었는데요. 은솔, 걸균, 카즈네 샘은 여름 공연 때부터 참여해 주셨는데, 아까 말씀 주신 것처럼 처음 기획은 아주 단순하게 시작했잖아요. 제가 차학경이 언어를 소리와 침묵으로 만드는 방식에 굉장히 매료되었고, 이 텍스트를 소리 내서 읽었을 때의 감각이 저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낭독 퍼포먼스를 기획하게 된 건데. 비교문학과에 있다 보니 여러 언어권과 문화권에서 오신 샘들을 많이 뵙게 되고, 그래서 샘들과 다언어 낭독 퍼포먼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사실 다른 한국어, 다른 모국어, 비-국민에 대한 생각들이 전부터 있었지만, 샘들과 교류하면서 더 자각하게 된 것도 있었고요. 그래서 아직 차학경의 연구나 작업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국어 혹은 한국 내부의 차이들을 드러내는 작업을 차학경을 경유해서 해 보고 싶다고 처음에 생각했어요. 하다 보니까 낭독의 차원을 많이 넘어선 퍼포먼스가 되었지만요. 제가 궁금한 것은, 여름 공연에 참여하셨을 때와 이번 파워플랜트 공연을 하시면서 경험이 어떻게 달랐는지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카즈네 : 공연 끝나고 느낀 게 있었는데요. 여름에 했을 때는 정체성을 벗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언어를 벗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둘 다 백지로 만드는 감각은 공통되는데, 여름에는 국적, 나라에서 추방당하는 체험에 더 초점이 있었던 것 같고, 이번에는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신생아들이 언어를 배우고 버리는 사이클을 재현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후걸균 : 저는 이번에는, 이게 저한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지점이기도 한데요. 저의 일상생활을 연극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실은 외국에 와서 공부하게 된 것 자체는 제가 살았던 고향에서, 억압받았던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못 찾아서 타국에 가서 공부라는 이유로 회피하면서도 즐기는 거죠. 그런데 그것 자체가 삶이라기보다는, 상상 속에 남아 있다는 느낌이 큰 것 같고요. 작년 여름 때는 거의 학생들끼리만 했는데, 이번에는 어트건 샘처럼 사회 경험이 많으신 분도 참여하게 되셔서 여러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고. 이른바 배우로서, 단지 사람으로서뿐 아니라,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을 하는지, 어떤 대상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하는지 많이 배우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배움에서 삶의 배우가 된 것 같아요.
백은솔 : 저는 두 공연 자체의 차이인지 그 기간 동안 제 생각이 바뀐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이번 공연에서 좀 더 제의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했던 것 같아요. 공간이 무대와 관객이 나뉘어 있는 익숙한 극장이었던 첫 번째 공연과 달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원래 확고하게 이런 거 안 믿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종이를 소거할 때 제의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던 것 같아요.
오윤주 : 이번 파워플랜트 공연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복화술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공연을 기획하면서 걸균 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걸균 샘께서 배 안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는 ‘뱃속말’이라는 제목을 제안해 주셨잖아요. 그래서 뱃속말에 복화술(腹話術) 한자를 더해서 〈뱃腹속話말術〉이라는 제목을 만들게 되었는데요. 여름 공연 〈Remnants. 사라진〉도 그렇지만, 차학경이 언어를 사용할 때 항상 하나의 소리, 하나의 의미만 가질 수 없게 만들잖아요. 그래서 저희 공연의 제목도 하나의 기호로 치환될 수 없는, 번역 불가능한 어떤 기호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이 프로젝트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파워플랜트라는 공간을 너무 사용하고 싶었거든요. 그곳을 일종의 죽음이자 재탄생의 제의적 공간, 뱃속의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 파워플랜트에서 실제로 공연하시면서 어떠셨는지, 그 공간과 어떻게 공명하셨는지 이야기 나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플로렌시아 : 먼저 파워플랜트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예전의 원래 역할을 지금 하고 있지 않은 공간이잖아요. 그러한 공간을 우리가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사용하고 점거(inhabit)한다는 의미의 중요성이 컸던 것 같고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언어로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공간이 매우 컸고, 추웠고, 시멘트이다 보니 우리의 몸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이 퍼포먼스를 하기에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퍼포먼스에서 의도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이 이 공간에 적응해야 했고, 커져야 했고, 더 강한 존재감(presence)을 가져야 했어요. 이곳이 우리를 양육할 일종의 자궁과도 같은 공간이라고 했을 때 신기하기도 했지만, 사실 퍼포먼스를 하면서는 그 공간에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일상생활과는 분리된 다른 공간 같았어요. 그곳에서 리허설도 하고 많은 일들을 했지만, 공간에서 리허설을 하면서 우리 몸이 겪어야 했던 시간 역시 퍼포먼스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퍼포먼스 당일뿐만 아니라요.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장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장면이 어떻게 보였으면 하는지, 이런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 공간 자체가 신체 같다고, 신체 내부에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주의하거나, 이런 모든 과정들이 그 공간 자체와 소통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 공간에서 이 퍼포먼스가 효과적으로 작동한 것 같아요. 마치 거대한 폐와도 같은 공간에서…
이혜목 : 윤주 샘이 의도하셨듯이 폐허와 같은 감각도 있었고, 버려진 공간을 재탄생시키고 무언가 다시 시작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이 공연을 통해서 소생시킨다는 느낌. 플로렌시아 샘이 말씀 주신 것처럼, 새로운 공간의 의미를 우리가 같이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
오윤주 : 사실 플로렌시아 샘 말씀처럼, 정말 우리 몸에 친절하지 않은 공간이었잖아요. 연극에 적합한 공간도 아니었고. 우리가 최대한 소리를 크게 내려고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던 부분들도 많았던 것 같고요. 또 관객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다 보니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관객들의 시선과 동선도 계속 변화하기도 했잖아요. 특히 둘째 날 공연 때는 관객도 같이 이동하면서 관람을 했다 보니 관객들 사이를 헤치고 저희가 지나가기도 했었고요. 그런 경험도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카즈네 : 원래 저도 연극을 할 때는 극장에서밖에 안 했었는데요. 극장이나 무대가 퍼포머들을 위해, 연극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보니까 턱도 없고, 다칠 가능성이 있을 만한 곳도 다듬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리허설할 때 처음 들어가도 어느 극장이더라도 다 아는 구조인데. 작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때 〈Remnants. 사라진〉 공연을 ‘플래그테일 팁시’라는 공간에서 했을 때도 신기하긴 했지만, 이번 파워플랜트는 그보다 훨씬 턱이 많고…
오윤주 : 톱? 턱?
카즈네 : 턱. 발 걸리는.
플로렌시아 : 턱. 외국인끼리는 알아들었어요. (웃음)
카즈네 : 턱이 많았고. 높이나 조명도 그렇고, 창문이 나 있는 것도 그렇고. 이런 것들이 전혀 우리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구조였다 보니까 우리가 맞춰 가는 과정이 필요했잖아요. 여기는 이런 것이 있으니 피해 가야 한다, 여기는 열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그 공간에 적응해 가는 느낌이었어요. 새로운 환경에 가서, 혹은 새로운 환경에 태어나서 처음 적응하는 과정들과 비슷하기도 했고요. 아까 플로렌시아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그런 상상까지 했어요. 우리가 마치 적혈구 백혈구가 되어서 몸 안을 뛰어다니는 느낌. 그런데 뛰어다니는데 여기서는 꺾어야 한다, 여기서는 이쪽으로 가야 한다는 뭔가 본능적인 느낌은 있고. 그런 것들을 실행하는 큰 터였다고 생각해요.
후걸균 : 파워플랜트라는 공간의 이름이 자꾸 영어로만 불리는데. 그 뜻이 ‘힘찬 식물’인지 모르겠는데요. 어쨌든 그 장소 안에서 저희가 몸으로 느낀 것들과 사실은 아주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오윤주 : ‘플랜트(plant)’가 공장이라는 뜻도 있고 식물이라는 뜻도 있어요. 전력(power)을 만들어 내는 공장. 그런데 방금 ‘힘찬 식물’이라는 시를 쓰신 것 같아요.
후걸균 : 아, 저는 계속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윤주 : 감각이 굉장히 새로웠겠네요.
후걸균 : 힘찬 식물인데, 분진도 많고 폐기물도 많고, 비어 있고, 말해 봤자 큰 소리 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고. 친화적이지 않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몸 안에서도 그런 공간이 있죠. 저희가 눈으로 볼 수가 없는, 사람마다 몸 안에 있는 친화적이지 않기도 하고 위험한, 그리고 보면 끔찍할 수가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차학경의 세계를 접한 것도 시와 영상을 통해서 접한 것인데,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소리 한 초 한 초마다 소리 자체의 온도와 색깔이 있는데. 이 공간에서 너무나 차학경적인 온도와 색깔을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실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겪을 수도 있는, 저희 모든 멤버들이 거기서 일하면서, 또 관객들이 구경하면서, 모든 참여자들 다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죠. 저희 폐나 기관에 폐를 끼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을 해서요. 일종의 사후 세계 체험인 것 같기도 해요.
이혜목 : 위험한 공간이었네요. 실제로 위험했죠.
오윤주 : 듣다 보니, 저는 개념적으로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제의적 공간으로서 자궁-무덤이라는 개념, 그리고 뱃속이라는 개념을 상상했던 것인데. 사실 감각적으로는 말씀 주신 것처럼 너무 차갑고, 척박하고, 폐허 같고, 너무 큰 그런 공간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게 잘 맞고 좋았던 것 같아요. 자궁이라고 했을 때 보통 생각되는 축축하고 안락한 그런 공간이 아니라, 사실 죽음이라든지 탄생이라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뭔가를 희생해야 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고행이기도 하고, 노동이기도 한 거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들을 감각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플로렌시아 : 전통적인 무대에서 했다면 많이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이번 공연에서는 관객도 이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고, 공연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서 다른 전통적인 무대보다 더 뱃속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은솔 : 저도 추웠던 게 기억에 남아서, 설날 때 제사 지내면서 이 공연이 생각났어요. 제사 지낼 때도 조상님들 오시라고 창문 열어 놓잖아요. 그렇게 죽음과 연결되는 경험과 추위라는 감각이 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연 끝나고 전시 지킴이 하면서 관객들이 없을 때 혼자 앉아 있는 경험도 좋았던 것 같아요. 공연이 지나가고 난 뒤의 공간에 있는 경험.

촬영|김조안
촬영|김조안
오윤주 : 우리가 대본 워크숍을 통해서 대본을 같이 만들었잖아요. 사실 며칠 전 양효실 선생님과 인터뷰할 때 저희가 거의 매주 워크숍을 하면서 대본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정말 젊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웃음) 저도 이제 돌아보니 작년 여름 공연까지 포함하면, 2025년 3∼4월에 시작해서 2025년 12월∼2026년 1월까지 계속했으니까. 9∼10개월 동안 거의 매주 모여서 차학경의 《딕테》를 읽고, 공연의 대본을 만들기 위한 워크숍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요. 걸균 샘은 그 과정에서 별도의 텍스트를 쓰시기도 했고, 그 텍스트가 ‘원생생물의 발성 연습을 위한 탁아소 아이의 모음표’라는 한 꼭지로 각색되어서 대본에 들어오기도 했고요. 또 카즈네 샘이 한국에서 이름을 불릴 때 겪었던 경험을 나눠 주신 것에 영감을 받아서 제가 출석 장면을 만들기도 했고요. 은솔 샘 같은 경우에는 작년 여름에는 대본의 마지막 꼭지를 써 주셨고, 이번 공연 때 플로렌시아 샘은 특히 움직임을 많이 만들어 주셨고요. 또 대본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다 보니 우리가 다 같이 번역하고, 번역 노동을 엄청 많이 했잖아요. 이런 과정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통제권을 가지고 기승전결이 있는 어떤 하나의 대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워크숍을 통해 어떤 무수한 공동의 목소리가 인용되는 방식으로, 특히 시위 장면에서는 역사 속의 시위문들, 선언문들을 우리가 인용했었고. 제가 논문이나 다른 텍스트들을 대본 안으로 많이 끌어오기도 했고요. 저는 이런 과정들을 통해 걸균 샘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모국어자로서, 그리고 전문적인 예술가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같이 만들 수 있는 어떤 구조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여러 언어로서, 그리고 여러 배경의 사람들이 같이 무언가를 만든다고 할 때 가능한 방식이 무엇일지 실험해 보고 싶었고요. 그런 과정에 참여해 주신 소감, 생각도 나눠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굉장히 힘든 과정이기도 했죠.
후걸균 : 최근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두 달 동안 계속 아팠거든요. 그동안 한국의 기후에 적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중국 남부 지방에 있는 고향에 가니까 습하고 더운 공기에 몸이 좀 약해져서, 거의 두 달 동안 기침을 하더라고요. 감기도 걸리고. 그래서 몸 안에서도, 아까 적혈구 이야기도 나왔는데, 무언가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보이지 않는 노동. 몸 안에 그러한 별도의 삶이 있는데, 그것이 저희의 워크숍이라는 노동인 것 같아요. 워크숍에서 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자기 경험들을 다 말로 이야기하고, 그거야말로 소통인데, 그 과정에서 글자로 내용으로 뜻으로 남게 된 것들은 실은 무수히 많지만, 결국 그것을 대본으로 윤주 님께서 써 주신 것이고. 그것을 또 퍼포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된 그런 과정이죠. 그런 보이지 않는 노동,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동이 있는 거죠. 그리고 또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제가 고향에 가서 운전을 많이 하게 됐어요. 병원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것도 그렇고, 또 설날이다 보니 먼 곳에 사는 친척에게 가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수술을 받으셔서 저만 운전을 며칠 동안 계속했어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운전한 건 처음인데, 재미있었던 건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에는 소통이 있는 것 같아요. 불빛이랑 소리, 경적, 비켜 주는 움직임 등등. 여러 방식으로 자동차라는 쇠 껍질, 그 껍질 안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 얼굴이 안 보이면서 소통할 수가 있는지 되게 재미있었어요. 차가 너무 막혀서, 거의 몇십 대의 차와 한 시간 동안 계속 소통해야 했어요. 그래서 이 워크숍도 그런 과정 같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움직임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실은 100% 생각을 전달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같았던 것들, 같았던 것들을 토대로 달라지기도 하고. 더 같아질 만한 것들을 만드는 과정이어서 평소 생활하면서도 그 시간을 많이 떠올려 보게 되더라고요.
오윤주 : 그 비유가 정말 와닿네요. 막힌 자동차들끼리의 소통.
이혜목 : 워크숍 초반부터 참여해 오신 샘들 다들 어떠신지 좀 궁금해요. 저는 나중에 들어왔다 보니까.
백은솔 : 초반에는 좀 정적으로, 글을 써 와서 공유하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아요. 그 워크숍 자리에만 들어오면 다들 목소리가 차분해지고. 책을 낭독하고. (웃음)
카즈네 : 맞아요. 오늘은 몇 장 낭독해 보죠, 하면서 시작하고.
백은솔 : 그때도 워크숍에서 움직임도 해 보자고 했었는데 잘 안 되다가, 이번 공연 때 현지수 선생님이 들어오시면서 움직임을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오윤주 : 맞아요. 중간에 하차하게 되셨지만 지수 샘께서 움직임을 많이 만들어 주셨고, 또 나중에 오셨지만 플로렌시아 샘도 움직임에 많이 도움을 주셨죠. 움직임 만드실 때의 생각들도 좀 공유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플로렌시아 : 제가 춤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단순할수록 좋다(less is more)’는 것이었어요. 이번 퍼포먼스에서 지수 샘과 제가 공통으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만드는 모든 움직임이 다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하려고 했고요. 저에게는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움직임, 그리고 우리에게 사실인(real)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무언가를 연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실제 현실에서 움직임을 하는(do) 것이요. 무언가를 생각해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하고, 그 순간을 사는 것이 필수적이었어요. 예를 들면, ‘투명한 관’ 장의 터널 장면에서 우리의 전제는 어딘가로 가야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어려움을 겪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칠레에서 무용수로 활동 중인 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가 어떤 장소로 가고자 할 때 무엇이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뒤에서 무언가가 우리 몸을 잡아당긴다든가, 혹은 몸의 어떤 부분이 기능하지 않는다거나, 앞을 볼 수 없다거나, 이런 예시들을 같이 생각하게 되었죠. 단순하지만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만들고, 무언가를 애써 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게 만드는 움직임들이요. 우리의 몸이 물리적인(physical) 어려움을 겪게 하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 백지를 사용한 움직임의 경우에도 ‘단순할수록 좋다’고 생각했어요. 시위라는 전제가 주어져 있었고요. 칠레에서는 이런 식으로 종이를 가지고 시위를 하지는 않지만, 아시아에서는 이런 식으로 많이 하니까요. 백지 움직임도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움직임이 매우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워크숍에 처음 왔을 때 효진 샘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데요. 작년 여름 공연을 보고 배우가 실제로 잠에 든 것인지 연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했잖아요.
오윤주 : 〈Remnants. 사라진〉 공연에서 졸음을 연기하는 부분이 있었죠.
플로렌시아 : 맞아요. 이번 공연에서 특히 우리가 말하는 언어와 더불어 움직임이 핵심 요소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움직임에 있어서 매우 정확해야 하고, 의식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움직임을 의식한다는 것은 우리 몸을 가지고 존재(presence)하는 것이에요.
오윤주 : 퍼포머로서 참여한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움직임으로서도 그렇고, 대사, 발화에 있어서도 그렇고. 연극적인 부분도 있고 퍼포먼스에 더 가까운 부분들도 많이 섞여 있었는데요. 연기와 움직임을 해 오신 분들도 있었고, 아예 처음인 분들도 많았는데. 그런 경험들이 어땠는지, 그리고 이 공연을 함으로써 변화된 것이 있는지 궁금해요.
카즈네 : 연극이나 공연을 올릴 때에는 무대 위에서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나 행동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은 실생활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고. 그렇다고 실생활에서 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무대에서 하면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지고. 무대 위에서의 행동이 있죠. 저도 그냥 취미 동아리로 했던 거라서 전문적인 것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인 지식은 갖추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면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요. 그런데 그때 모인 선생님들이 대부분 그런 경험이 없으셨고, 그래서 그냥 실생활의 움직임들을 무대 위에 가져오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관객들에게 보여질 수 있는 상태로 어떻게 녹여 봐야 하나 생각했는데, 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극장에서 공연했을 때는 목소리가 작거나 움직임이 좀 어색하거나, 그냥 거기서 걸어 다니는 사람을 무대 위에 데리고 온 것처럼 정말 실생활의 움직임들을 보여 주는 느낌이었는데. 이번 파워플랜트 공연은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 해서 오히려 잘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파워플랜트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연극적인 움직임을 했다면 잘 안 맞았을 것 같아요. 전면이 없고, 백스테이지도 없고, 무대가 아닌 공간이었으니까요.

촬영|손다니엘

촬영|김조안

촬영|김조안
오윤주 : 혜목 님도 연극 동아리를 하셨던 경험이 있잖아요. 어땠어요?
이혜목 : 저는 연기는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렵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저는 연극 동아리에서도 정형화된 연극이라든지, 어떤 배역을 입고 그 사람이 되어서 메소드 연기를 한다든지, 이런 상황들이 약간 힘들 때도 있었는데. 이번에 저희가 같이 무대를 올렸을 때는 무언가 정해진 틀이 있고, 그에 맞추어 잘 해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어서 오히려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한 개체라기보다는 뱃속 안에서 움직이는 많은 아이들 중 한 명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혼자 연기한 것이 아니라 아홉 명의 퍼포머들과 같이, 함께하는 경험이었기 때문에. ‘같이’라는 감각이 주는 어떤 힘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오윤주 : 저도 생각해 보면 아홉 명이 같이 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배역이 주어진 게 아니었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어떤 배역을 연기한다기보다는 집단으로서, 집단적인 몸으로서 참여했던 것 같고, 제가 잘 못해도 옆에 계신 분들을 의지하면서 간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카즈네 : 뭐랄까, 이주하는 새들 있잖아요. 철새들 같은 느낌으로. 같이 가다가 앞에 세 마리가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고, 이런 느낌.
이혜목 : 아홉 마리의 철새들. (웃음)
백은솔 : 저도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한 이후로 처음 하게 된 건데요. 그때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게 정해진 극을 올린다는 느낌보다는 저희가 퍼포밍도 하고 극작도 하면서, 몸으로 해 보면서 장면을 만들었는데. 그때는 약간 조별 과제 같은 느낌으로 딱 분담을 해서 서로가 맡은 장면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공연은 다들 애착을 가지고 하다 보니까 더 어려워진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워크숍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 같긴 한데,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면 대화를 하면서 또 뭔가 다르게 흘러가고, 뭔가 재료가 나오면 윤주 샘이 가져가셔서 또 새로운 것이 되어서 대본에 들어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또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힘들어하는데, 그런 연습도 됐던 것 같아요. 크게 말하는…
오윤주 : 제가 은솔 샘을 수업에서 처음 뵈었을 때는, 엄청 조용조용히 말씀하시잖아요. 사실 그런 모습을 보고 캐스팅을 하고 싶었거든요. (웃음) 저희 공연이 말할 수 없음, 말할 수 없는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까. 은솔 샘이 항상 힘겹게, 말을 한 마디 한 마디씩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공연을 같이 하면 좋겠다 생각해서 그때 부탁을 드렸는데, 흔쾌히 와 주셨고요. 저는 작년 여름부터 1년이 지나는 기간 동안 선생님이 무언가 변화되는 모습을 봤어요. 특히 이번 공연 때 저희가 움직임 워크숍을 하면서 자유롭게 움직여 보는 시간도 가졌는데, 초반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이, 멈춤에 가까운 그런 움직임을 하시다가 점점 더 다양한 시도를 해 보시는 것을 보면서 보기 좋았던 것 같아요.
카즈네 : 은솔 샘이 특히 여름 공연 올릴 때,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어요. 그게 나쁘다는 것이 절대 아니고,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안 나는데 영어로 무언가를 탁 말하는 장면에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후걸균 : 은솔 샘, 윤주 샘과 첫 모임을 했을 때 약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저도 원래 목소리가 작아서 주변 사람들한테 말할 때 제가 느낀 목소리의 음량과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목소리가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도 계속 들었어요. 몸이 예민해서 큰 소리로 말하면 너무 자극을 받아서, 거의 귓속말에 가깝게 작게 말하게 되는데요. 그런 면에서 은솔 샘과도 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저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윤주 샘이 너무 재미있어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공연 때는 파워플랜트라는 공간 자체가 너무 커져서, 무조건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잖아요. 그런 과정을 겪고 나서 저도 뭔가 약간 달라진 것 같아요. 말하는 것 자체가 원래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는데, 너무 큰 소리로 계속 말을 하면 여전히 힘들긴 한데요. 사실 똑같은 말이어도 굉장히 많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원래 하던 그 방식 말고도 다른 방식들을 조금씩 해 봐도 괜찮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실생활과 연극에서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고요. 제 고향에서 문학예술을 하는 사람이 제 또래뿐만 아니라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아래 세대에서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연기를 잘해야 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어떤 말투로, 어떤 습관적인 언어를 써야 하는지 아주 어릴 때부터 짐작해 온 거예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어도 항상 마음에 숨겨 두고, 할 수 있는 말, 들어 줄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인데. 이번 연극을 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원래 해 왔던 방식 말고 또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해 줄 수 있는 거구나. 그런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맥락에서 아까 삶의 배우라는 이야기를 한 거였어요.
오윤주 : 저도 많이 공감돼요. 저도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은솔 샘, 걸균 샘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 말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는 타입인데요. 그런데 공연을 하면서 뭐랄까, 사람들이 다 나를, 우리를 보고 있고, 내 몸이 여기 존재하고 있고, 존재해도 되는구나. 이런 것들을 좀 신체적인 차원에서 체험하게 된 것 같고, 그러면서 몸 안의 어떤 감각이 변화하게 된 것 같아요.
후걸균 :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너무 짧게 말씀하셔서…
이혜목 : 연극이 사람을 바꾸죠.
오윤주 : 그렇죠. 아마 다 그러시겠지만, 저도 이 두 번의 연극을 하면서 정말 다시 태어난 듯한 감각을 많이 느꼈는데요. 공연을 하기 전과 하고 난 뒤의 몸은 완전히 다른 몸인 것 같아요. 그 공연을 하는 시간 동안, 그 시간이 몸을 통과하면서.
후걸균 : 제의의 역할일 수도 있네요.
플로렌시아 : 저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거 너무 힘들어요. 영어로 말할 때 더 쉽게 할 수 있는데, 스페인어 할 때는 오히려 더 책임감이 많고, 제 모국어여서 더 완벽하게 해야 해서 사람들 앞에서 논문 발표해야 할 때, 혹은 가르쳐야 할 때, 너무 긴장되고 떨리고 어려운데. 현대 무용을 공부할 때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말 없이도 몸으로 표현을 잘할 수 있어서요. 또 이번 공연은 저한테 더 특별한 의미였는데요. 여기서 한국어를 말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너무 어렵고 힘든 시간이 많았고, 그런데 이 공연을 통해서 한국어로도 다 이해할 수 있고, 한국어를 이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 과정인 것 같아요. 스페인어로도 말할 수 있어서 저희 문화를 여러분께 보여 줄 수 있어서 좋았고, 너무 안전한 공간이었어요. 아직 부족하지만, 좋은 사람과 있으면 점점 더 잘할 수 있겠구나.

촬영|김조안

촬영|손다니엘
오윤주 : 이어서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저희가 어쨌든 다언어 다문화 공동체였잖아요. 여러 언어권, 문화권에서 오신 분들과 같이 작업을 했는데. 그 경험도 저는 굉장히 특별하고 달랐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서 참여해 주신 샘들도 많았고요. 또 여기 계신 카즈네, 플로렌시아, 걸균 샘 모두 어떻게 보면 오사카 방언, 칠레 스페인어, 광둥어라는, 표준어가 아닌 언어가 모국어인 분들이시잖아요.
후걸균 : 저 심지어 이번에 고향에 가서 깨달았는데요, 제가 광둥어보다도 더한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희 마을 사람들은 실은 평생 광둥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들어가서 알게 된 게 제가 시골말을 더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시골말 하는 사람이랑 광둥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통역이 필요해요. 그래서 제가 그 역할을 많이 하게 됐어요.
카즈네 : 어떤 게 달라요? 어휘가 달라요?
후걸균 : 어휘도 다르고, 발음도 다르고, 말하는 이미지도 굉장히 달라요. 도시와 시골 사이의 차이일 것도 같고요.
카즈네 : 같은 문자를 쓰는데 그걸 쓰는 법이 다른 거예요?
후걸균 : 문자가 없어요.
카즈네 : 그럼 어떻게 표기해요?
후걸균 : 표기할 수 없어요. 말로만. 기억을 할 수 있는 사람만 그 표현을 아직 쓸 수 있는 거예요.
오윤주 : 몇 명 정도가 그 말을 해요? 시골말이라고 하는. 화자가 지금 몇 명 정도 있어요?
후걸균 : 저희 마을은 200명 정도만 있는데.
이혜목 : 저희 대본에서 이야기했던 ‘멸종 위기의 언어’네요.
후걸균 : 맞아요. 그게 사실이 되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더 잘하려고, 배우려고 하고 있어요. 제 세대부터 이미 그 말을 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해도 그 맛이 안 나고요. 다음 세대부터는 심지어 광둥어도 안 하고 만다린어만 하게 되어서.
오윤주 : 저희 공연에 사용된 여러 언어들 사이에도 위계가 있지만, 사실 하나의 언어 안에서도 이런 식의 위계들이 있잖아요. 공연에서 사용된 한국어도 사실 동일한 한국어가 아니었잖아요. 굉장히 다른 발음의 한국어들이 있었고, 또 다른 외국어들과 접합된 새로운 한국어이기도 했고요. 공연에서 다들 각자 여러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런 경험들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카즈네 : 저는 사실 제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계속 일본에서만 살았고, 사투리라고는 하지만 그 사투리도 일본 안에서는 표준어 다음의 메이저한 언어이기도 하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진학한 대학이 외국이었던 것뿐이지, 뭔가 다른 나라의 피가 섞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로 이주한 경험도 없어서 저 자신이 굉장히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오윤주 : 그래도 워크숍하면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으로서의 경험도 많이 이야기해 주셨었잖아요.
카즈네 : 제가 처음에 한국에 가고 싶다, 외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스스로가 외국인이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너무 단순하게 살아와서, 그게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너무 다수자로서만 살아와서 저의 특별한 부분들, 특수한 저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한 것들도 그냥 다수자 안에서 한 점으로밖에 되지 않으니까. 아예 다른 환경에서 외부인으로서 살아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싶어서 온 것도 있는데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아름다운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 작년 공연 참여할 때쯤에 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저 자신에 대해서 좀 방황하는 시기였어서, 워크숍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승화시키는 시간들이 있었잖아요. 연극 올리는 순간뿐만 아니라 그 워크숍 자체가 제의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워크숍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제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고 말했었어요. 힐링하는 경험이었죠.
오윤주 : 감동이네요.
카즈네 : 그리고 저는 무슨 언어든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중국어 화자의 일본어, 한국어 화자의 일본어 이런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한국어 모국어 화자분들도 다 각자 그들만의 화법이 있잖아요. 발음하는 법이든, 회화법이든. 그런 것들이 평소에는 한국어 화자, 외국어 화자로 나뉘는데. 이렇게 아홉 명의 배우가 있고 외국어 화자 분들이 많다 보니 한국어 모국어 화자분들도 하나로 묶이지 않고 각자만의 한국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 선생님은 이런 발음을 하는구나. 다른 한국어, 다른 말 같다. 다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후걸균 : 저 평소에 안경 벗고 사물과 사람을 보는데, 그러면 실은 사람은 얼굴이 안 보여요. 얼굴은 그냥 색깔이에요. 그래서 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방금 카즈네 샘이 하신 말과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사람한테 과연 얼굴이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얼굴이나 언어, 이름 같은 것들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어서. 카즈네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어 화자도 각자 그 사람의 말, 소리, 소리 자체도 모습이 있고, 그 모습으로 그 사람의 정서, 생각, 나에 대한 적대감이라든지, 오해라든지,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동물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런 경우에도 삶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다시 공동체라는 말. 저희도 실은 이번에 공연하는 과정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그런 과정에서 더 좋은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은솔 : 저는 사실 한국어와 영어를 편하게 하는데, 그걸로 제가 다언어, 특히 다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좀 많이 부끄럽고요. 그런데 아까 플로렌시아 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국어라서 더 부담감을 느낀다는 말에 공감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영어에 대해서는 그 언어의 법칙을 정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반발심이 있기 때문에 좀 막 해도 된다는 생각이 있다면, 모국어에 대해서는 정말 잘 쓰고 싶은데 계속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계속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일상생활에서 말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내뱉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는 것 같고요. 또 공연에서 프랑스어 시위문을 가져올 때 어떤 텍스트를 가져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프랑스 혁명이나 국가로서의 프랑스라는 상징적인 무언가를 가져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른 분들도 시위문 가져올 때 고민을 많이 하셨겠지만, 처음에는 저항적인데 나중에는 그게 또 다른 내셔널리즘이 되는 과정이 있으니까. 그런 과정이 지나간 다음에 어떻게 소환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다가 탈식민주의에 대한 글을 가져왔는데요. 잘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혜목 : 너무 좋았어요. 파농의 글이었죠.
오윤주 : 사실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층위도 있었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를 더 실험해 봤잖아요. 의미가 없는 소리들로 어떤 언어를 만들기도 하고, 몸짓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저는 그런 것들까지 다 포함해서 어떤 공동의 언어를 우리가 만들고, 또 허무는 그런 과정이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플로렌시아 :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무의식적으로 특정 소리를 선택하고, 나머지 소리들은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모국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마주치는 일은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일과도 같은 것 같아요. 이 공연을 통해서 익숙하지 않은 많은 언어를 마주치고, 듣고, 모음을 가지고 실험하고, 그러면서 이 언어들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시도한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명백하지는 않더라도 다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속에서, 저는 언어를 통해 타인과 연결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그런 각각의 경험에 길을 터 주고,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정치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요. 기억에 관련해서도, 그리고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멀리 보기 위한 시도로서도요. 예를 들면, 칠레에서는 사람들이 그날 처음 만났더라도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정말 깊은 부분까지 대화할 수 있고요. 그래서 가끔은 한국에서 지내면서, 제가 어떤 벽을 쉽게 깰 수 없는 이유가 언어적 이유인지 문화적 이유인지 고민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문화가 자기 나라의 문화와 다를 때 쉽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저는 한국은 어떻다든지, 한국인은 어떻다든지, 이렇게 라벨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한 이 공연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흑백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기도 했어요. 가끔은 정말 연결되기 위해서 어떤 공간, 경험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이번 공연은 저의 일상생활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경험이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그리고 제가 조금은 이방인으로 여겨졌던 한국이라는 나라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후걸균 : 저는 사람마다 소리도 있고 색깔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에서는 검은색과 흰색, 회색이 많고,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동일성이 있는 색깔을 선호하는 것 같아서, 그런 색깔이 눈에 먼저 띌 때가 많고요. 그런데 성격도 색깔이잖아요. 색이 진한 사람, 연한 사람. 그런 맥락에서 윤주 샘이 어떤 공동어를 만들고 싶다는 발상도 있으셨고, 실제로 연극의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것을 같이 만들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왔었잖아요. 지수 샘께서 말씀 주셨던 점토라든지, 자연물이라든지, 어떤 물질적인 형태를 같이 만들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시간은 항상 연속적인 거잖아요. 사람마다 인생이라는 시간 자체가 전체적이고, 분해될 수가 없는, 제가 20년 먼저 살고 30년 뒤에 남은 몇 년 정도 더 살아 보고 싶다고 해도, 시간은 그냥 가는 거잖아요. 유동적이고 지속적인 것인데. 그런데 온도라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니고, 한 사람 두 사람의 몸에만 사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차학경의 언어도 그렇고, 민족마다의 언어도 그렇고, 사투리도 그렇고. 예를 들어서 제가 사투리라는 언어를 더 잘 써서, 저와 많이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 주고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이 언어 자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것은 언어가 시간을 잠깐 이길 수 있는 사람의 힘이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다양한 것처럼,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언어를 쓸 때 실은 그 사람에게 고유한 그런 발성의 방법이 있어 왔는데,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는 그런 고유한 발성 방법까지 버려서 새로운 언어의 습관을 배우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연극하고 나서 저의 시골말을 다시 배웠어요. 그래서 지금 제 고향 사람들은 저를 무서워해요.
오윤주 : 왜요? 자꾸 물어봐서요?
후걸균 : 아니요, 제가 그 사람들보다 더 잘해서요.
참석자들 : 진짜 무섭겠다, 무서워. (웃음)
카즈네 : 그 언어의 이름은 뭐예요?
후걸균 : 그 마을 이름으로 그 언어 자체를 명명했는데요. 상갱(上坑), ‘위에 있는 구덩이’라고, 그래서 상갱말이에요.
이혜목 : 저는 처음에 이 프로젝트가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르고 그냥 차학경에 관한 것이라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윤주 샘이 반복해서 한국 안에 있는 어떤 다른 한국어들에 관한 공연이고, 한국이라는 어떤 동일한 정체성 안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혹은 이미 있었던 균열을 재인식하려는 시도라는 이야기를 해 주시니까. 저도 나중에 좀 이해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저는 사실 비교문학과에 몸담고 있는 게 아니니까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가 잘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문화권에서 오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시는 선생님들을 만나고, 또 우리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좋고 재미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플로렌시아 샘께서는 칠레의 민주화 운동이나 칠레의 여성 작가들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너무 재미있고 좋은 거예요. 카즈네 샘도 언어학 공부하시는 이야기라든지, 예전에 연극하셨던 경험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고. 걸균 샘도 샘께서 하시는 서예 활동이라든지, 한자나 어떤 언어와 접목한 미술 활동을 저희에게 제시해 주셨는데, 그런 것들을 같이 체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겪을 수 있어서 그 과정들이 다 너무 재미있고 좋았어요. 그리고 언어의 측면에서는, 저는 대본에서는 한국어 대사를 했다 보니 가장 편하게 참여했던 것 같은데. 세계 곳곳에서 지금 쓰이고 있는 말들이 이렇게 한곳에 모여서 같이 섞일 수 있었던 체험도 특별했던 것 같고. 저도 카즈네 샘처럼 다른 언어나 다른 발화들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개인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이걸 계속 이어 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오윤주 : 사실 굉장히 여러 가지 층위가 있잖아요. 이번 공연이 단지 한국어에 대한 공연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전면에 대두되기도 했었고요. 사실은 제가 《딕테》나 차학경이라는 작가에 이렇게 깊게 몰입하게 된 것은 저의 사적인 트라우마의 경험들, 그리고 언어로부터, 몸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경험들을 항상 해 왔기 때문에 쉽게 동일시가 되었던 것 같은데요. 저는 누가 어떤 말을 할 때 잘 못 알아듣고, 소통이 잘 안 되는 경험을 좋아하거든요. 소통할 수 없으면서도, 그것으로써 소통이 되는 어떤 언어, 혹은 공연, 혹은 존재 방식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고. 그런 일을 함께해 주셔서 저는 사실 너무 감사하죠. 저도 너무 좋았고요. 이 멤버로 또 무언가를 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 공연을 마무리하고 나서 또 무언가 남은 것이 있는지, 어떤 것을 더 해 보고 싶은 게 남았다면 이야기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이혜목 : 방금 이야기해 주셔서 생각났지만 이게 차학경에 관한 공연이었잖아요. 그렇지만 단순히 《딕테》를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한다거나, 차학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려준다거나, 《딕테》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했다면 굉장히 재미없거나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지금처럼 의미가 있지는 않은 공연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들, 타자성의 계기들을 많이 들여오고, 특히 외국어 화자 선생님들과 같이 만나서 같이 공연을 꾸려 나가면서 비로소 큰 의미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평소에 영상 작업을 할 때도 계속 트라우마나 역사나 기억이나 다른 사람들,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살아야 하는지, 혹은 자꾸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전쟁이 일어날 때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는 작업을 많이 했었는데요, 그런 고민들이 이번에 우리가 같이 올렸던 공연과도 많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했던 공연을 어떻게 좀 더 잘 이어 갈 수 있을지 저도 고민이 많이 되어서, 생각나는 게 있으면 공유해 드리고 싶어요. 같이 해서 너무 좋았어요. 윤주 샘이 어제 개고생이라고 하긴 했지만. (웃음)
백은솔 : 다들 고생 많으셨고요, 특히 윤주 샘 고생 많으셨어요.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고요. 이 공연을 계기로, 이 공연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인연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아요. 감사했습니다.
플로렌시아 : 이번 기회처럼, 나중에 이렇게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또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학경, 혹은 다른 작가,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어떤 공연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어떤 생각, 어떤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무까지는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우리는 계속 생각해야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야 해요.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웃음) 이번 공연은 저에게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어요. 여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목소리들이 사라지지 않게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 감사합니다.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카즈네 : 저는 너무나 개인적인 소감인데.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정말 힐링이 되는 과정이었고, 그렇다고 개고생했던 것이 다 미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웃음) 그래도 이 공연이 없었으면 훨씬 더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 과정이 앞으로도 저 자신에게 엄청난 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여기 오고 나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 것들이 정말 많아서, 그런 부분들이 또 어딘가에서 뱉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저 자신에게도 좋을 것 같고, 이런 예술 활동으로 승화할 수 있으면 또 좋을 것 같고요. 제가 기대하는 것은 이제 너무 안에서만 봤으니까, 이 아카이빙 작업을 통해서 밖에서 볼 때 우리의 작업이 어땠는지 궁금하고. 개인적으로 제가 연극을 썼을 때 제가 쓴 대본을 아예 다른, 얼굴도 모르는 단체에서 써 주신다고 하면 엄청 뿌듯하거든요. 그런 기회가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후걸균 : 저도 고향에 귀국한 두 달 동안, 저희 모임이 저에게 마음에서 의지하는 그런 시간이자 공간, 사람들이 되어서 제 삶에 있던 위기들, 그리고 장애물들에 더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같고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제 입장을 표명하고, 제가 저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더 잘 실천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연극 연습을 할 때 지수 샘께서 연극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요. 일상생활도 일종의 연극인데, 생활에서도 한 개인의 역할을 가지게 되면 이 생활도 더 나아가게 될 수가 있고, 사람마다의 삶은 그냥 정체되지는 않을 거예요. 사람마다 얼마나 힘들어도 삶 자체는 나아갈 테니까. 그런데 그 나아가는 과정에서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힘이 돼서 모두들 힘찬 식물이 될 거예요. (웃음) 그리고 사람마다 자기 색깔이 있지만, 둘째 날 연극 시작하기 전에 어트건 샘, 카즈네 샘과 같이 그림자극 할 때 썼던 커다란 흰 천 뒤에 숨어 있었는데요. 그 천 뒤에 서 있으면 밖이 잘 보이지만, 바깥의 사람들은 그 천 뒤에 있는 사람들을 잘 못 봐요. 어트건 샘도 저희 어머니와 또래이시고 또 여동생이 있으셔서, 어트건 샘과 카즈네 샘과 서 있는데 뭔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연극이나 공식적인 것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그냥 수다 떨고 있다 보니까. 각자 원래의 색깔들이 있지만 흰색 옷을 입고 수다 떨었던 시간에는 잠시 흰색이 같이 있는 것처럼 느꼈었어요. 아, 그리고 또 홍콩에서 어떤 작업을 같이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오윤주 : 방금 걸균 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지막 말이 생각났는데요. 지금 다시 깨달았지만, 저는 이 작업을 하면서 듣는 방법을 많이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엄청나게 귀 기울여서 들어야 하거나, 혹은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알아듣기 힘들거나, 잘 이해가 안 되거나, 소통이 잘 안 되는 그런 말들을, 꼭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열심히, 힘을 들여서 듣는 일. 그렇게 듣는 방법을 많이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촬영|손다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