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間지〉 2026 여름호 | Play-list

Play-list란?

희곡(Play)과 리스트(List)를 합친 이름으로, 서포터즈 정인이 희곡 한 편과 그 결이 닮은 문학, 음악, 전시, 영화 등을 큐레이션해 소개합니다.

정인(노라조 2기)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이야기를 상상하는 사람. 끊임없이 무대를 세우고 허무는 희곡처럼 ‘열린 세계’로서의 예술을 전합니다.


7월의 Play-list

당신의 화를 다스릴 이열치열 작품 zip

선정작



Track 01. 균열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분노

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Track 02. 외침

세상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즈번



Track 03. 응시

분노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




#Play-list Note

여름은 뜨겁다. 햇빛은 강하고 공기는 후덥지근하다. 짜증이 쉽게 치밀고, 화가 솟구친다. 이열치열. 

더위를 뜨거움으로 다스리듯, 이번 큐레이션에서는 분노라는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뜨거운 계절에 분노의 얼굴들을 함께 들여다보자.



Track 01. 균열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분노

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트로피즘(굴성)> (AI 이미지)


1. 우리 왜 싸웠지?

언젠가 ‘말다툼’을 주제로 글을 쓴 적 있다. 이상하게도 누군가와 다퉜던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는 지나치게 사소했다. 그래서 그것을 원인이라 하기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 거다.


나탈리 사로트의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역시 그런 애매모호한 감정에서 출발한다. 오랜 친구인 두 남자가 만난다. “요즘 왜 나를 차갑게 대해?”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서서히 꼬여 간다. 너무나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된 말다툼은 좀처럼 끝날 줄 모른다.


2. 트로피즘 Tropism

나탈리 사로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트로피즘(Tropism/굴성)’을 이야기한다. 식물학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식물이 외부 자극에 반응해 특정 방향으로 휘어지는 성질을 뜻한다. 사로트는 이 개념을 가져와, 인간의 행동과 감정 역시 환경과 상황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고 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에서 ‘트로피즘’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언어로 모두 담아낼 수 없다. 언어는 상대에게 전달되는 순간 또 한 번 굴절된다. 같은 말 한마디도 누군가에게는 다정함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욕으로 들린다.


그래서 희곡 속 두 남자의 싸움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대화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며 점점 더 깊은 내면으로 파고든다. 질투와 자격지심, 서로가 살아온 삶의 차이까지 기어코 끄집어낸다. 희곡 속 황당한 말다툼을 따라가 보자. 어느 순간 끝없이 뻗어 가는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Track 02. 외침

세상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즈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1956년 연극 무대


1. 분노의 얼굴

‘지미’는 친구 ‘클라프’와 아내 ‘앨리슨’을 끊임없이 도발하고 비난한다. 그에게 승리란 곧 상대가 분노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분노’는 개인의 성격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분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된 영국, 과거 제국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기성세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외침이다.


2. 돌아보기

지미의 집요한 목소리는 때로 통쾌하기도 불편하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노는 원룸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작품의 모든 사건이 지미의 좁은 아파트 안에서만 벌어지듯, 그의 목소리는 정작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때로는 선명한 적을 향한 분노가 길을 잃어버리게 한다. 분노는 지미를 생생히 살아 있게 하지만, 동시에 그를 이상적인 세계 속에 갇히게 한다.


지미의 몸부림치는 언어들은 극이 끝나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러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꺼끌거리는 모래알처럼 마음 어딘가에 남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관객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대사
 


Track 03. 응시

분노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


<성난 사람들> 시리즈 1 스틸컷


1. 가면을 쓴 사람들

시리즈 〈성난 사람들〉 시즌 1 역시 ‘분노’에서 출발한다. 성공한 사업가 ‘에이미’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대니’는 난폭 운전 사건을 계기로 서로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분노는 점차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일상까지 무너뜨린다.


문득 ‘마스크’가 떠올랐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자 표정을 애써 꾸며 내지 않아도 되었다. 일종의 안정감마저 느꼈다. 매일 마스크를 쓰다가 벗게 되었을 때, 오히려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하지?’ 그때 깨달았다. 짜증과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을 꽤 오랫동안 감추며 살아왔다는 것을.


시리즈의 인물들 역시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있다. 성공한 척, 괜찮은 척, 행복한 척 살아간다. 그러나 작은 사건 하나로 가면은 부서지고 만다. 그 순간, 진짜 ‘나’와 ‘너’의 얼굴이 드러난다.


2. 분노라는 신호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분노’는 세상을 향한 저항의 목소리다. 한편, 시리즈 〈성난 사람들〉에서 ‘분노’는 자신의 결핍과 진심을 마주하게 하는 감정이다.


상처와 고통에도 층위가 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보다 이야기하는 일이 더 고통스럽다.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는 빈부격차와 이민자의 정체성 같은 사회적 문제가 배경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인물들을 결국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내면에 쌓여온 감정들이다.


어쩌면 분노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노를 끝까지 들여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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