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 멜로드라마
19세기 초부터 멜로드라마(Mélodrame)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지배적인 극 양식으로 부상했는데, 특히 르네 샤를 길베르 드 픽세레쿠르(René Charles Guilbert de Pixérécourt, 1773∼1844)는 멜로드라마의 아버지라 불리며 120여 편의 작품을 통해 멜로드라마의 형식적 특징을 완성했다.
멜로드라마는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에서 벗어나 극장 구도를 바꾸는데 큰 몫을 했다. 1807년 나폴레옹이 인가한 극단은 8개에 불과했지만 약 50년 사이 28개로 크게 늘었다. 그중 국가 보조를 받는 극단은 오데옹, 오페라코미크, 코미디프랑세즈, 오페라 극단 등 4개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19세기 내내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그랑 불바르 극단이었다. 신예 작가들을 기용해 실험적이고 새로운 연극 무대를 선보였는데, 특히 멜로드라마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멜로드라마 공식
① 착한 주인공(주로 여주인공)과 악한이 대립한다.
② 주인공은 삶, 명성, 행복을 위협하는 사건을 잇달아 겪으며 극복할 수 없는 고난에 시달리다 구제된다.
③ 도입 이후 사건이 급속히 진행되다 강렬한 클라이맥스를 맞은 다음 빠르게 마무리된다.
④ 주요 사건은 모두 무대 위에서 일어난다. 무대에서 종종 전투, 호수, 지진 같은 정교한 스펙터클과 이국적 배경이 재현되었다.
⑤ 변장, 유괴, 감춰진 신분, 우연한 행운 등으로 플롯이 전형적이며 권선징악이 엄격히 지켜지는 편이다. 악인은 마지막 장면에 이를 때까지 승리할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한다.
⑥ 주인공의 하인 또는 친구가 희극적 긴장 완화(comic relief)를 제공한다. 노래, 춤, 음악이 어우러져 감동을 강조(멜로디 드라마)한다. 19세기 내내 연극은 음악과 함께였다.
단순하고 강렬한 이야기, 권선징악, 춤과 노래 등 버라이어티 요소를 특징으로 한 멜로드라마에 관객은 열광했다.
멜로드라마의 인기는 ‘연출’에 대한 새로운 관점, 관심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시다발적 사건과 스펙터클, 우연히 엿듣게 되는 대화, 때맞춰 등장하는 인물, 스펙터클의 전개, 악한이 지진, 화산 폭발, 그 밖의 재해로 파멸하는 마지막 장면 등을 위해서는 고도의 시간, 공간 계산이 필요했다. 이처럼 복잡한 요소들을 무대에서 얼마나 잘 조화시키느냐에 연극의 성패가 달렸다. 픽세레쿠르는 무대화 과정에 작가가 절대적인 감독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공연에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영국에서 멜로드라마
1802년 영국에서 첫 멜로드라마가 상연되었다. 토머스 홀크로프트(Thomas Holcroft, 1745-1809)의 <미스터리 이야기(A Tale of Mystery)>다. 1804년 새들러스 웰스 시어터(The Sadler’s Wells Theatre)에서는 물탱크를 설치하고 수중극을 공연했다. 무대에서 해상 전투, 입수자 구조 장면이 재현되었다.
1820년대 피어스 이건의 〈톰과 제리, 일명 런던 생활〉은 이국적 배경 대신 런던의 주요 장소를 배경으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멜로드라마에 지역 색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833년 에드워드 피츠볼(Edward Fitzball, 1792-1873)은 범죄 실화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를 유행시켰다. 대표작 <조너선 브레드퍼드 혹은 로드사이드 여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초연 당시 160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860년까지 유지되었다.
멜로드라마의 발전은 무대 발전을 가져왔다. 극의 배경,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둔 덕분이었다. 찰스 킨(Charles Kean, 1811-1868)이 1850년부터 1859년까지 프린세스 극장(The Preincess’s Theatre)에서 상연한 셰익스피어 극은 무대 장치, 의상, 대소도구 등 모든 면에서 역사적 정확성을 따르고 있었다.
무대와 더불어 조명 기술도 발전했다. 1820년대 들어 가스가 촛불을 대체했다. 1850년대에 이르러 중앙 가스 배전반을 통해 무대 조명을 즉시 그리고 완전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880년대부터는 전기 장치로 대체되었다.
멜로드라마는 당시 계층 사회를 아우르는 장르였다.
18세기 들어 중산층(뷔르거, 부르주아)이 주요 관객으로 부상했는데 19세기를 거치며 관객층은 평민(하층민)까지 확대되었다. 대극장은 2000-2500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각계각층의 관객이 한 공간에서 연극을 관람하며 서로 동질감을 느꼈다. 이로써 영국 극장에 새로운 관람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어니스트? 어니스트!〉와 멜로드라마
빅토리아식 멜로드라마는 당대의 사회 가치와 도덕 기준을 반영하면서도 극적 서사와 감정적 요소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니스트? 어니스트!〉는 19세기 후반 런던 무대를 지배하던 빅토리아식 멜로드라마를 뒤집으며 뛰어난 풍속희극, 기발한 소극으로 자리 잡았다. 와일드는 희극적 전통인 소극(farce)과 멜로드라마 요소를 결합해 등장인물과 그들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를 과장한다. 소극은 잘못된 신분, 믿기 힘든 상황, 빠른 전개에 중점을 둔다. 두 주인공 잭과 앨저넌이 얽히는 정체성 혼란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소극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 Estate of Oscar Wilde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의 초기 원고에서 제목은 〈Lady Lancing〉이었다.
사회적 배경
이 작품은 1895년 2월, 런던 킹 스트리트에 위치한 세인트 제임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고 우아한 극장을 당시 배우 겸 극장 관리자였던 조지 알렉산더가 임대하고 있었다. 와일드는 알렉산더를 “매우 인상적인 존재감, 매력적인 목소리, 아름다운 의상을 우아하게 소화하는 능력을 가진 낭만적 배우”라고 평가했다. 도시적인 세련미를 갖춘 두 사람은 이상적인 협력 관계를 이루었다. 세인트 제임스 극장은 당시 가장 세련된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근처에는 ‘신사 클럽’들이 자리했다. 또 독신 남성들을 위한 고급 아파트로 유명한 올버니와 인기 있는 윌리스 레스토랑도 가까이 있었는데, 이 두 장소는 작품의 다양한 버전에서 언급된다. 세인트 제임스 극장의 관객들은 무대에서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거나 들어 본 ‘사회적 분위기’를 목격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왜곡되었지만 말이다. 작품은 그 세계를 호의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이 세계는 탐욕(심지어 버터 바른 머핀을 위한 것일지라도), 자기 만족(주요 등장인물들은 실제로 일을 하지 않음), 그리고 재정적 불안(브랙넬 여사는 세실리의 재산 이야기를 듣는 순간 태도를 완전히 바꿈)으로 특징지어진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연극의 정교한 무대 세트와 복식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독창적인 장르 결합
작품의 전개는 끊임없이 통제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이어지며 웃음을 자아낸다. 이는 와일드의 극작술이 지닌 독창성으로, 작품이 담고 있는 풍자적 의도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와일드가 장면을 구성하고 억눌린 감정을 담아내는 대사로 웃음을 유발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알렉산더와 동료 배우들은 빅토리아 시대 레퍼토리에 능숙했고, 관객 반응을 이끌어 내는 기술에 익숙했다. 이 작품의 독창성은 주로 완벽하게 짜인 플롯과 세련된 스타일에 있으며, 다양한 장르—벌레스크(저급한 풍자와 해학이 있는 희가극), 풍속희극, 멜로드라마, 소극—를 절묘하게 결합한 데 있다. 1895년 한 평론가는 “와일드의 영감이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그가 그 어떤 것에도 크게 의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나는 그의 다양한 취향을 비난할 의도가 없다”라고 평했다. 소극은 대칭을 사랑하는 장르로, 이 작품도 인물을 묘사할 때 서로 역할을 바꾸고 거울처럼 반영하는 전통적인 기법을 활용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훌륭하지만 완전히 대칭적이지는 않다. 세실리가 ‘악명 높은 사촌 어니스트’에게 끌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앨저넌의 이름은 끝까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완성 요소가 오히려 상황을 초월한 욕망의 승리를 더욱 인상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와일드가 극작가로서 받은 초기 영향은 본질적으로 ‘멜로드라마적’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 초반에 이르러 와일드는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벗어나 특유의 재치 있는 대화와 섬세하게 다듬어진 도덕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회극’이라는 혼합 형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 이어 〈별 볼일 없는 여인〉(1893), 〈어니스트? 어니스트!〉와 같은 시기에 공연된 〈최고의 남편〉(1895)이 그런 예다.
1899년 〈어니스트? 어니스트!〉 12부 한정판 중 하나에 남긴 오스카 와일드의 서명
레딩 감옥에서 힘든 시기를 보낸 뒤에도 와일드는 자신의 작품이 문학적 지위를 인정받기를 원했고 한정판 출간은 그 목표의 일환이었다.
와일드의 삶과 작품
〈어니스트? 어니스트!〉는 겉으로는 단순한 행운이 승리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적인 역설을 통해 통념을 뒤집으며 진리를 드러낸다. 제목에 담긴 언어유희도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원칙인 ‘성실함이 보상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해체한다. 또한 ‘Earnest’라는 단어는 와일드의 지인들 사이에서 비밀 신호로 통했을 가능성이 있다. ‘Earnest’가 남성 간의 동성애를 뜻하는 ‘Uranian’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렇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작품 속 ‘번버리’라는 알리바이 설정 역시 동성애를 범죄로 여긴 사회에서 은밀하게 살아가야 했던 동성애자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동성애적 암시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와일드가 이 작품을 쓸 때 자신의 인생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료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나중에 제기한 불만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와일드의 “처음으로 정말로 냉혹한 희곡”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작가에게 유리한 평가로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은 전혀 희화화된 존재가 아니지만 철저히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작가는 당대 귀족들을 의도적으로 단순화하고 풍자적인 방식으로 묘사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가 상상하는 귀족 말투와 유사하게 들리지만, 정확한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사실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와일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들 대부분 재치 있는 인물들이다. 다만 그들의 농담은 때로는 의식적이며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다. [출처 : 존 스토크스(John Stokes, 런던 킹스 칼리지의 현대영국문학 명예 교수) 원문]
2024. 10. 16.
지만지드라마 조은정, 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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